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국 본토 항공전 (문단 편집) == 계속되는 전투 == 독일은 산발적인 야간 공습을 계속했다. 그리고 영국은 아직 이에 대한 대응체계가 미완성인 상태였던 까닭에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. 대표적인 예로 11월 14일 코번트리 대참사를 꼽을 수 있다. 군수공장이 몰려있던 코번트리에 독일 공군은 야간 공습을 감행하였고 사실상 지도에서 지워질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. 이 폭격에 대해 독일군은 지도에서 도시를 지워버린다는 의미로 코번트리화라는 단어를 붙였으며, 이런 식의 야간 공습이 계속되었고 그런대로 재미를 보던 독일 공군은 12월 29일, 런던에 대대적인 야간 폭격을 감행하였다. 그 결과 런던 역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굳건하게 버텨내고 있었다. 이런 식의 독일 공군의 산발적인 야간 폭격은 1941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. 하지만 히틀러가 [[소련]] [[독소전쟁|침공]]을 준비하면서 프랑스 북서부 해안에 있는 공군을 서서히 동부전선으로 옮겨야 했으므로 공습의 빈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. 그 결과 영국 공군을 상대할 정도의 전력만 남겨둬야 했는데 이 경우 영국 공군이 오히려 기세등등하여 역공을 가할 수 있었다. 특히 1941년에 접어들면서 영국 폭격기 사령부가 독일 도시에 대한 보복 공습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뜨거운 맛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. 이에 따라 5월 10일 500여기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한 런던 야간 공습을 감행하였다. 그 결과 런던이 다시 불바다가 되었지만 독일군의 야간 공습을 상대하면서 실력이 늘어난 영국 공군과 런던의 대공포대의 활약으로 20여기 정도를 격추시킬 수 있었다. 이 공습을 마지막으로 독일 공군은 런던에 대한 야간공습을 중지하였다. 1941년 중반에 접어들어 항공전이 막을 내리게 되었을 때, 독일의 항공기 손실은 독일이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의 120%~180%를 초월했고 탄약, 항공유, 항공폭탄, 정비 부품 등의 공급도 독일의 역량을 1.5배 가까이 뛰어넘어 버렸다. 더욱 치명적인 손실은 바로 '''조종사'''들이었다. 1939년부터 경혐을 쌓은 수많은 베테랑들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'''소멸'''되었다.[* 100기씩 떨어뜨릴 수 있는 에이스 수십 명보다는 10기 정도 떨어뜨릴 수 있는 베테랑 수천 명이 훨씬 더 중요하다. 격추 수도 그렇거니와, 후자가 지속적으로 훈련과 경험을 쌓으면 '''100기씩 떨어뜨릴 수 있는 파일럿 수천 명'''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.] 이 손실 때문에 독일 공군은 소련 침공 당시 중국 공군 수준의[* 사실 중국 공군은 물량이 딸렸을 뿐, 파일럿 수준은 압도적인 수의 일본군 앞에 [[상하이 전투]]에서 하루이틀 정도는 제공권을 잡고 있었을 정도로 괜찮은 편이었다. 독일과 영국, 미국에서 보낸 의용군과 교관들이 많이 가르쳐주고 알려줬기 때문. 오히려 소련 공군에는 이만도 못한 파일럿들이 들끓었다.] 역량밖에 없는 소련 공군 상대로 고전하는 등 망신을 면치 못한다. 21세기 들어서 지속적으로 당시 독일의 전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독일의 총력전 역량에 대한 의문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고, 최근 학계에서는 __사실상 영국 본토 항공전이 끝난 시점에 독일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다 써 버렸다__고 평가하기도 한다. 더 나아가서 1940년 후반부터 이미 독일의 패전이 시작되었다고 보며, 루프트바페는 1940년 이후로 몰락해 버렸다고 여긴다. 실제로 소련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고 여겨져 왔던 [[바르바로사 작전]]에서도 독일군의 진격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, 물자 공급선이고 방어선이고 하나같이 개판이었으나 소련이 군구제를 도입했다가 [[겨울전쟁]]으로 쓴맛을 보며 빠르게 철회하는 전술 공백의 시기였던 동시에 [[대숙청]]으로 지휘부가 다 쓸려나갔던 여러 가지의 악재가 겹쳐서 밀렸던 것 뿐이라는 것이다. [[레닌그라드 전투]]와 [[키예프 전투(1941년)|키예프 전투]]를 보면 독일군의 전쟁 수행 역량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. 이전까지는 독일군이 곧바로 모스크바로 밀어닥치지 않고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로 꺾은 것이 패착이라고 여겼지만[* [[에리히 폰 만슈타인]], [[하인츠 구데리안]] 등의 회고록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. 이들은 전후의 회고록에서 [[히틀러]]의 군사적 판단을 매우 강하게 비판했다. 일개 전투나 전역에서만 활동하는 장군 입장에서는 전선 전체와 국가의 경영까지 봐야 하는 최고 지휘관의 판단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.] 최근 연구가 진행되면서 '그랬다간 우크라이나 군구의 병력에게 포위섬멸됐을 것이다'라는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. 즉 하인츠 구데리안이 "모스크바로 병력을 더 보냈으면 모스크바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"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, 모스크바를 함락시켜도 우크라이나 병력이 북상하여 보급로를 끊어 버리면 모스크바의 독일군은 꼼짝없이 포위섬멸되었으리라는 것이다. 병력을 모스크바로 다 몰아서 보내면 우크라이나에서 포위섬멸되고, 병력을 우크라이나와 모스크바로 나눠 보내면 모스크바를 함락할 전력이 부족해지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던 것이 당시의 독일이었고, 히틀러는 그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후자를 선택한 것 뿐이었다는 평가도 많이 나온다. 다시 말해서 [[바르바로사 작전]]은 '''독일의 역량으로 어림없는''' 작전이었다는 것이다. 게다가 독일의 [[산업공학]] 수준[* [[산업공학]]이라는 것은 무기 혹은 상품을 빠르게, 튼튼하게, 그리고 정비성이 좋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설계를 하는 공학적 역량을 말한다. [[티거]]나 [[판터]]만 봐도 고장나기 쉽고 많이 만들기 어려운 정밀부품을 쓰며, 보닛이 없어 엔진을 뜯으려면 포탑을 들어내야 하는 등 정비성은 개나 줘버린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. 독일은 [[기계공학]]만 발달했지 산업공학 능력은 [[답이 없다|심각한 수준이었다]].], 병력의 질[* 독일군은 [[바이마르 공화국]] 시절에 많이 감축되어서 장교, 부사관들은 능숙했지만 일반병의 역량은 형편없었다.], 무기 보급 체계[* 단일화된 무기를 사용함으로서 탄약, 포탄, 바퀴, 유류의 보급을 쉽게 하는 건 군사의 기본이다. 가령 어떤 국가가 1개월 석유 생산량이 200톤인데 디젤엔진과 가솔린엔진을 쓰는 두 종류의 전차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면 디젤을 100톤, 가솔린을 100톤 준비해야 하며, 디젤엔진을 쓰는 전차가 전멸해버리면 디젤 100톤은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한다. 반면 가솔린엔진의 장점이 좀 아쉽더라도 디젤엔진을 쓰는 전차만을 생산하면 쓸데없이 가솔린을 생산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200톤의 생산량을 오롯이 디젤에 투자할 수 있다. 실제로 현대 미국은 전차 등 전투병기는 물론이고 험비 등 전술차량, 심지어 야전사령부 등에 쓰이는 이동식 발전기까지 모두 디젤도 가솔린도 아닌 그 비싼 [[항공유]](JP8)를 사용한다.][* 예시일 뿐으로 가솔린엔진은 디젤엔진보다 연비가 안 좋아서 비율을 동등하게 만든다는 건 가솔린 안 쓰겠단 소리다.] 등에 있어서[* 심지어 더 막장인 건 [[88mm|만능포]]라고 불리는 대전차포, 대공포, 곡사포, 함포 모두를 커버칠 수 있는 명품 대공포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독일이었다는 것이다. 독일은 이 좋은 무기를 600문도 안 뽑았다. 더 정확히 말하면 22,000문 가까이를 뽑았지만 그 중 지상전투를 상정한 41모델은 556문 뿐이었고, 그 밖의 모델들은 지상용으로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포 차체를 달고 움직여서 지상용으로 쓰려면 차를 뜯어야 했다.] 독일은 끔찍함의 극치였다. 그런데도 이런 독일군이 유럽 최강의 육군을 가진 프랑스를 이길 수 있던 것은 장교와 부사관들이 매우 우수했기 때문이었으며 독일의 파일럿들은 세계 최강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. 막장일로를 달리는 독일군을 멱살 잡고 프랑스 함락까지 끌고 갔던 건 우수한 장교와 부사관들이었던 것이다. '''그리고 이 장교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인적 자원인 파일럿들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녹아버렸다.''' 독일군이 물량에서 앞서 있었음에도 영국군의 효과적인 작전으로 영국을 끝내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[[제1차 세계 대전]] 당시처럼 서부, 동부 양쪽 전선에서 싸우다가 패배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[[아돌프 히틀러]]의 계획을 틀어지게 만들었다. 이후의 전역은 [[독일 본토 항공전]]으로 이어진다. 독일도 이를 인식했는지 1942년 4월과 5월에 바데커 공습(Baedeker Blitz)이라 하여 엑세터와 바스, 노리치, 요크 등 영국의 주요 도시를 폭격했다. 이 작전에서 총 1,637명의 영국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고, 총 5만 채 이상의 집이 불에 탔다. 그 외에도 독일 공군이 영국을 타겟으로 한 대규모 폭격은 1944년에 있었다. 그게 바로 스타인복 작전(Operation Steinbock)이다. 1944년 1월부터 5월까지 전개된 작전으로 총 500대 이상의 독일군 항공기가 동원되었다. 수도 런던과 브리스톨, 헐 그리고 카디프에 총 14번의 공습이 있었다. 당시 런던 사람들은 이를 작은 공습이라 불렀는데, 총 1,5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3,000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. 하지만 [[독일 본토 항공전]]에서 나온 것과 같이, 이미 1942년부터 공습을 당했고, 1943년과 1944년에는 그 공습이 독일 전역으로 퍼져서 수도 베를린을 포함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. 여기서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또 다른 공습을 시도 했는데, 그게 바로 미사일을 이용한 공습이었다.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은 V-1 로켓 미사일을 수도 런던에 발사했다. 1944년 6월과 8월 사이에 대략 1만 개의 V-1 미사일이 영국에 발사되었다. 효율성은 그리 좋지 않았다. 발사된 1만 발 중에 2,500발만 명중했다. 1944년 9월부터 독일은 V-1 대신 새로운 로켓 미사일을 발사했는데, 그 미사일이 바로 V-2 로켓 미사일이었다. 1944년 9월 8일부터 1945년 3월 27일까지 총 1,400개의 V-2 로켓 미사일이 수도 런던과 노리치에 발사되었고, 총 3,000명이 사망했으며 6,500명이 부상당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